(사진과 글이 많은 포스팅입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강하게 받게 되실 겁니다.)
비너스를 구경하고 계속해서 박물관 관광을 이어갔다.
아직 조각상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볼 것이 너무 많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아우구스트 황제 L’empereur Auguste
칼리굴라 황제 L’empereur Caligula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 같은 조각상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지하 1층 조각상 영역을 다 구경하고
1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 앞에 섰는데
저기 딱 하고 승리의 여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Nike
승리의 여신 !!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루브르 박물관의 3대 대표작 중 하나인 승리의 여
사진으로 많이 봤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만나니 믿기지가 않았다.
따로 전시실이 마련되어 경계가 삼엄한 곳에서 전시가 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동하는 공간에, 유동인구가 많고 잘 보이는 곳에 전시를 해뒀다.
보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진이 많아서 조각상 아래쪽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니케는 여기 아랫부분까지를 포함해서 같이 봐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 니케를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Νίκη της Σαμοθράκης (NIKE of Samothrace)
그리스 신화의 날개 달린 승리의 신이다.
기원전 220년에서 19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328cm이며 머리와 양팔이 잘린 채로 남아 있다.
스틱스의 딸로, 엄마의 명령으로 티타노마키아 때 남매 크라토스와 함께 참전했다
이후 언제나 아테나와 함께 다니며 승리를 가져다 젔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다양한 니케 조각상은 많이 발견이 되는데,
이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이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보면, 정말로 승리의 여신이 축복을 내리기 위해 막 뱃머리에 내려앉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바다를 항해하는 배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살포시 배에 내려앉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잘 표현했다.
니케가 입고 있는 옷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도 그렇고,
바람을 맞으며 이제 막 배에 내려앉는 모습이기 때문에 얇은 옷이 그녀의 복부에 밀착이 되어 있는 모습도 잘 표현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온전히 니케만 사진에 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감상을 했는데
어찌나 생동감이 있던지
저 날개를 펼치고 금방이라도 다시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체가 앞으로 쏠려 있으면서도 오른쪽 다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
정말 배에 내려앉은 여신의 모습이다.
사진으로 봐도 정말 생동감이 있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참을 구경을 하고 또 다른 작품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이제 명화를 보러 갈 차례다.
이 작품은 명화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의 작품, Alessandro Filipepi이다.
동남아시아를 가 보면 불교문화가 강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확실히 유럽은 가톨릭 문화가 강한 것 같다.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면 확연히 느껴지는데, 나는 내용을 잘 알지 못해 모든 그림을 이해하는 것에는 제한이 있었다.
그래도 닌텐도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천천히, 그리고 되도록 자세히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박물관은 예전의 궁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엄청 넓고 큰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는 빈 공간 없이 명화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내가 모르는, 처음 보는 명화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가득히 이어져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맨 아래 초상화는 ‘라 벨 페로니에르의 초상(La belle ferronnière)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Mona Lisa)를 포함해서 총 5개의 초상하를 남겼는데,
라 벨 페로니에르의 초상도 그중 하나이며, 체칠리아의 초상화(Cecilia Gallerani)도 유명한 작품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만났던 동굴의 성모를 다시 만났다.
(암굴의 성모, 바위 위의 성모라고도 한다.)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다.
동굴의 성모(Virgin of the Rocks, 1483 ~ 148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
같은 그림이 총 2점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을 그리고 난 후 같은 그림을 하나 더 그리게 되었다.
두 번째 작품은 밀라노 성당에 갔다가, 현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작품 완성 시간이 왜 3년일까?
그리고 두 작품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세례자 요한과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 머리 위에 후광(엔젤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청년여행의 지난 이여기]
저 남자의 시선이 꽤나 신경이 쓰였다.
눈싸움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인상적이었던 작품, ‘가나의 혼인잔치’다. (그림이 엄청 크다)
가톨릭에서는 원음을 살려서 카나(Κανὰ)의 혼인잔치라고도 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Marriage at Cana
요한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 중 하나로,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 첫 번째로 일으킨 기적이다.
(요한복음 2:2-12)
예수의 어머니(성모 마리아)가 그곳에 있었고,
예수와 제자들도 거기에 손님으로 있었다.
결혼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말했다.
포도주가 거의 바닥났구나.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관여할 일입니까?
지금은 나의 때가 아닙니다. 재촉하지 마십시오.”
예수의 어머니가 지체 없이 종들에게 말했다.
“그(예수)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여라”
예수는 하인들에게 물통에 물을 부은 후 그것을 그대로 손님들에게 내어 주라고 명했다.
하인들이 그대로 하자, 놀랍게도 물이 포도주로 변했고,
그것도 전에 마시던 것보다 더 질이 좋아서 연회를 책임진 사람이
“보통 좋은 술은 먼저 내놓고 나중에 덜 좋은 술을 내놓는 법인데 아직도 좋은 술을 남겨뒀구려!” 하고 감탄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새로운 와인을 따르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림이 어찌나 큰지, 멀리서 전체 그림을 바라보면서 성경의 문구를 떠올렸고,
또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며 와인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무나 인상적이고 감명적이었다.
이어서 명화가 끊이지 않고 나타났는데,
가나의 혼인잔치를 바로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내가 루브르에 오면 꼭 보고 싶었던 모나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보면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 궁금했던 그 그림,
모나리자다.
그림이 엄청 클 줄 알았는데, 가나의 혼인잔치를 비롯해서 크기가 엄청 큰 명화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모나리자는 조금 작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나리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 감동과 감격은 말로 다 하지 못 할 정도였다.
모나리자 Mona Lisa / 라 조콘다(La Gioconda) (1503 ~ 1506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의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다.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눈썹이 없는 그림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화라는 설이 흥미롭다.
루브르 박물관의 3대 대표작, 그 마지막!
나는 동선 마지막에나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박물관 동선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래서 어떤 동선으로 관람하든, 모나리자를 만나면 이제 반쯤 봤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특수 카메라로 모나리자를 보면, 다 빈치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으로 여러 겹 특수처리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추측하기로, 가장 바깥에(겉 부분에) 그렸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화학반응으로 사라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든 것 같은 인파가 모나리자 앞에 모여 있었는데,
그림이 크지 않아서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삼각봉을 들어 사진을 찍으려 하면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며 안내원이 제지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자세히 그림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림을 감상했다.
이 그림이 도둑을 맞고 다시 루브르로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루브르에 와서 모나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했다.
메두사 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테오도르 제리코)
1816년 7월 2일,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떠난 해군 군함 메두사 호가 난파했다.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표사했다.
그림이 사진처럼 생생해서 당시 파도에 넘실대는 난파선을 눈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 외젠 들라크루아, 1830)
그림 속에 노트르담 대성당도 확인할 수 있는데,
계급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와 시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그림의 부재는
‘1830년 7월 28일’이다. (작품 완성일)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의 혁명을 주제로 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Grande Odalisque,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오달리스크’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하녀를 의미하는 ‘오달릭 Odalik’의 프랑스 발음이다.
오달릭은 후궁의 시중을 드는 일을 했지만, 이슬람(오스만) 세계를 두고 상상력이 많았던 19세기 유럽인들이
오달리스크를 이슬람의 금단구역인 ‘하렘’에서 제왕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여자 노예로 상상을 해서 그린 그림이다.
여성의 허리가 엄청 길게 묘사되었다.
허리의 길이가 실제로는 정상적이지 않은 길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의 왼쪽 다리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를 따라가며 그림을 감상해야 한단다.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자세라고 한다.)
에로스와 프쉬케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유명해서 낯이 익은 그림이었다.
프쉬케와 밤을 보내고 기둥 넘어 날이 밝아 오자,
에로스는 잠든 프쉬케를 남겨두고 황급히 떠나고 있는 장면이다.
에로스와 프쉬케 그림은 저 그림뿐만 아니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에로스의 모습을 여러 그림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모습이다.
반대로 프쉬케는 운명이 점지한 지아비(에로스)를 본 적이 없다.
한밤중에 들어왔다가 날이 새기 전에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프쉬케가 에로스를 만나기 위해 신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도 이 명화에 숨겨진 재밌는 이야기이다.
에로스를 찾아 길을 나선 프쉬케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이야기를 찾아보면 참 재밌는 이야기가 많다.
에로스는 육체적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의 날개 달린 아들이다.
원래가 장난 꾸러기였는데, 하루는 아프로디테가 에로스에게,
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프쉬케에게 벌을 내려 어미의 한을 풀어달라고 얘기를 한다.
프쉬케의 벌과 상처가 크면 클수록 엄마인 아프로디테의 기쁨이 클 것이라 생각했던 에로스는
어머니의 말대로 벌을 주기 위해 프쉬케를 찾아 갔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같이 밤을 보내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엄마 아프로디테와 아들 에로스
그러고 보면 장난 꾸러기 에로스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신인데,
처음에 벌로 프쉬케를 화살로 찌르려했지만 잠에서 깬 프쉬케를 보고 깜짝 놀라 자기 손에 화살을 찌르는 모습이나,
에로스가 원래 나이를 먹지 않지만, 사랑을 시작하고 나이를 먹고 성장해 간다는 내용도 참 재미 있다.
이 그림 역시 루브르 박물관에 오면 꼭 보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Le Sacre de Napoléon, 자크루이 다비드, 1805~1807)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기념으로 네 개의 그림을 그릴 것을 명하였는데,
다비드는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대관식’ 그림을 완성시켰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로마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다.
왕관을 씌어주기 위해 월계관을 쓰고 왕관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은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왕관을 씌어주고 있는 모습이다.
오래 전 이 그림을 처음 알게 됐을때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왕관을 받는 대관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나폴레옹이 황후에게 왕관을 주는 대관식인 것이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무서워 실제 모습보다 나폴레옹의 모습을 크게 그렸고
사람들의 모습도 대부분 밝은 모습으로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비오 7세를 포함해서 참석했던 관중들은 이 대관식이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2층과 구석구석 참석자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이다.
왼쪽 아래에 작은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나폴레옹의 조카, 이후 나폴레옹 3세가 되는 아이이다.
호라티우스 황제의 맹세 (The Oath of the Horatii, 자크루이 다비드, 1784)
다비드의 또 다른 작품이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내게 알려줬던 그림이다.
명화를 다 보고 나니,
황금으로 된 복도가 나타났다.
초상화가 그려진 곳이었는데 초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화려한 궁궐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왕관과 티아라, 반지, 귀걸이도 볼 수 있었는데,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실제 왕관과 티아라, 그리고 장신구라고 한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강화유리 안에 전시를 해뒀었다.
복도를 이동하는 길에 창 밖으로 박물관 정원이 보이고, 또 유리 피라미드가 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 보였다.
무더운 여름이라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고 있었다.
화가 지망생 한 분이 조용히 서서 묘사를 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그림 실력이 엄청났었는데,
연필 하나로 쉽게 쓱쓱 그림을 묘사하는 것이 신기했다.
부디 좋은 작품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침실장면 (Marguerite de Valois, 1836년)
다른 명화 속, 같은 주인공
보고 싶은 그림은 많고,
새롭게 보고 만나는 그림도 너무나 많아서 엄청 설레었던 박물관 관람이었는데
야속하게 시간만 너무나 빨리 흘렀다.
박물관에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궁전으로 사용했을 당시 사용했던 가구도 전시가 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엔틱 제품들이었다.
루브르가 매력적인 것은
이런 궁전의 인테리어들을 그대로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도 그렇고 커튼과 조명이 모두 호화스러웠다.
연회장 같은 곳도 복도를 지나가며 관람할 수 있었다.
중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오는 궁전의 식사모습이 떠올랐다.
이 넓은 공간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이 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내 관람을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도 루브르는 아직 나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야외에도 구석구석 전시물이 놓여 있어서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살짝 긴장을 놓고 있었는데,
우와, 이 조형물을 보고 다시 발걸음이 멈춰졌다.
크로톤의 밀로 (Milo of Croton)
마르세유에도 있는 조각상인데,
사자에 물리는 남자의 모습을 정말 사실감 있게 잘 표현했다.
밀로가 보여주는 ‘절망’의 순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남자의 표정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마지막은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Code of Hammurabi)
고대 바빌로니아 제1 왕조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재위 BC 1792~ BC 1750)이 만든 성문법(成文法, written law)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잘 못된 내용이고, 1951년에 발굴된 ‘우르남무 법전’이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다.
그런데 어쨌든 함무라비 법전이 유명한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높이 2.25m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고,
쐐기문자에 의하여 전문, 후문 이외에 282조의 규정이 새겨져 있다.
법전 맨 위에 있는 조각은, 왼쪽이 함무라비 왕이고 오른쪽 의자에는 샤마쉬 신이 앉아 있다.
함무라비 왕에게 샤마쉬 신이 법을 하사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법전 앞에서는 왠지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세계사나 역사책에서 눈으로만 읽었던 함무라비 법전을 이렇게 보게 되니 너무 영광이었다.
이렇게 루브르 박물관 관광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예상해서 충분히 동선을 계획하고 보고 싶은 작품들을 선별해 갔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훨씬 훨씬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나는 5시간 정도를 박물관에 머물렀는데,
그럼에도 작품을 반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고, 꼭 봐야 하는 작품을 보기 위한 동선을 충분히 고려해서 관람을 하기 바란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면서 맡겨뒀던 내 신용카드를 돌려받았다.
영수증을 잘 챙겨뒀다가 잘 반납하고, 잘 돌려받았다.
박물관 안 카페테리아에 파리에서 파는 바게트가 맛있어 보였다.
5시간을 계속 걸으며 관람을 했고, 점심 때가 이미 훌쩍 지난 후였다.
관람을 마친 나는
아무 곳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천천히 바게트를 먹으며 관람 때 찍은 사진을 천천히 돌려봤다.
파리 바게뜨를 먹으며 사진을 천천히 음미하며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했다.
박물관을 빠져나가면서 유리 피라미드 밑을 다시 지났다.
피라미드 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박물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제 막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들어 올때와는 달리,
지하 1층에서 외부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서 이동을 했다.
이동하는 길에 지하 1층으로 내려 앉은 유리 피라미드도 볼 수 있었는데
마지막까지도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루브르 박물관 관광이었다.
20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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