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채 다 가시기 전에 숙소를 나섰다.
숙소 1층의 펍은 레스토랑으로 모습을 바꿔 숙박객들에게 아침을 내어주고 있었다.
레스토랑과 외부 조명이 미처 가시지 않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유로스타 EuroStar를 타고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의 맛있는 영국식 아침도 챙겨 먹지 못한 채 서둘러 길을 나섰다.
3박 4일을 머물렀던 숙소와는 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멀리서 온 나에게 침대 한 칸을 내어주었던 고마운 숙소였다.
처음 이 숙소를 정한 것은
나름 시내 중심가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유스턴(Euston) 역에서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면서도
런던 물가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에 있었다.
거기에 더해,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할 때 유로스타를 탈 계획이었는데
기차를 탈 수 있는‘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 역’과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있었다.
새벽 일찍 파리로 넘어갈 계획을 잡고서,
숙소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역까지 이동이 용이할 것 같았다.
크로스백 하나,
24인치 캐리어 하나를 들고도 새벽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여서 캐리어를 끌기에 길이 괜찮았고, 평지였기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 외에 오르막, 내리막도 없었다.
숙소에서 아침 6시쯤 출발을 했고,
예상대로 20분 정도만에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인트 판크라스 인터내셔널 St. Pancras International
런던의 철도역으로, 미들랜드 본선의 시발역이자유로스타 Euro Satr, 유라시아 철도의 종착역이다.
킹스 크로스(King’s Cross) 역과는 2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유스턴(Euston) 역에서도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해리포터의 소설 속 배경이 된 역이 바로 맞은편에 있는 ‘킹스 크로스 역’인데,
영화에서는 좁고 비좁은 ‘킹스 크로스 역’ 대신 이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 가짜 킹스 크로스 역으로 촬영됐다.
나는 아침 7시 1분,
9004편 / 런던 발 / 파리 행 / 유로스타를 탈 예정이었다.
플랫폼은 5번 플랫폼
이곳에서 유로스타를 이용해 파리뿐만 아니라
벨기에(Begium/Belgique)의 수도 브뤼셀(Brussels)이나
프랑스(France) 남부도시 마르세유(Marseille)로도 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열차 예약과 달리,
유로스타는 일찍 예약할 수록 금액이 저렴하다.
그래서 여행 일정이 확정되면 빠르게 유로스타를 예약하는 것이 여행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이다.
기차역이지만 역사는 국제공항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영국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국내선’ 기차역과는 다르게
‘국제선’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다 보니 공항에서 보던 편의시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다니!
오랫동안 꿈꿔오던 일이었다.
부산에서 일본을 오갈 때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보기는 했지만,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Strait of Dover)을 건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비행기를 타하늘 위를 날아서 건너거나 배를 타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싣을 수도 있는데,
도버해협의 해저터널이 생긴 후로 비용과 시간, 그리고 편의적인 이유로 배는 많이 타지 않는다고 한다.
혹은 버스를 타 해저터널의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깜깜한 터널이 다 지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거나
나처럼 기차를 타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저터널인 채널터널(Channel Tunnel)을 건너는 방법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차 여행을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는 매력 때문에 당연히 유로스타를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에 이끌렀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에서 승용차를 배에 실어 일본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국경을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기차로 국경을 넘으려면 한국이 아닌 제3국에서 다른 3국으로 국경을 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내 소원 중 하나가 여전히 ‘통일’인 이유가 이것이기도 하다.
기차 시간까지는 30분이 남았다.
나는 어제저녁 소호에서 먹었던 웍투웍(Wok to Walk) 중 포장으로 가져온 밥을 기차를 기다리면서 먹었다.
전자레인지가 있으면 데워서 먹었을 텐데, 아쉽지만 차갑게 식은 볶음밥이라도 감사하게 먹어야 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곳 의자에 앉아서,
내 기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영국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국제선 열차였지만,
출국장을 통과할 때는 비행기처럼 엄청 깐깐하게 짐을 검사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비행기가 훨씬 더 안전하지만 아무래도 비행기보다는 기차가 사고로부터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정말 타보고 싶었던 유로스타의 로고
다시 봐도 이 유로스타의 로고는 기차의 특색과 역할을 잘 반영하여, 참 잘 만든 로고인 것 같다.
이 기차를 타고 바닷속을 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었다.
우리네 KTX 객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국제 열차다 보니 큰 짐을 놓는 짐 칸이 객실 한켠에 마련되어 있었다.
내 캐리어도 여기에 잘 놓아두고, 크로스 백만 들고 자리로 갔다.
중간 정차가 없는, 파리직행 열차라서 짐이 바뀔 걱정은 없었다.
다른 이용자 후기를 수차례 보고 머릿속으로 연습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무리 없이 내 자리를 잘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제대로 열차를 탔는지 들려오는 안내방송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좌석이 바뀌지 않았는지 표와 좌석을 여러 번 잘 확인했다.
내 고향 부산의 부산역도
70년 전에는 국제선 열차가 발차하는 국제적인 역사였다.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면서
부산역에서 출발한 열차에 몸을 싣고 이곳 런던까지 기차로 오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7시 1분
정시에 열차가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출발했다.
이 열차가 파리를 향해 간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내 좌석은 역주행 좌석이었는데
창 밖으로 런던의 모습이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런던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창 밖으로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비를 만나지 않았는데
영국의 기후를 생각한다면, 여행 중에 비를 만나지 않은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울지 마, 런던 !
런던이 슬퍼서 우는 것이라 생각해두자.
그리고 다시 런던을 찾게된다면 오늘 이 기억을 다시 꺼내 추억하자, 라고 혼자 생각을 했다.
도심을 벗어난 유로스타가 평원을 신나게 달리는가 싶더니
곧 창 밖이 깜깜한 밤처럼 어두워졌다.
도버해협 아래, 해저터널로 들어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런던에서 가까워서 너무 놀라웠다.
창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작은 것 하나 놓칠세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의 작은 소리와 풍경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내 뒤에 앉은 커플은 이 장면이 익숙한지 아니면 아침 일찍 떠나는 여정에 피로했는지, 자리에 기대 잠을 자고 있었다.
창 밖이 깜깜해서 창으로 비친 뒷자리 커플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봤다.
복도 건너 친구들은
간단히 샴페인을 마시며 파리의 여행일정을 핸드폰으로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샴페인을 같이 나눠 먹고 싶었는데 눈길 한 번을 받지 못했다.
생각보다 터널은 금방 빠져나왔다.
해저터널의 길이는 약 37km다.
기차로 쌩쌩 달리면 20분도 되지 않는 시간으로 도버해협을 건널 수 있다.
이렇게 후다닥 프랑스 땅을 달리게 된 것인데,
진짜 영국에서 프랑스가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다.
오래 전 너무나 재밌게 봤던
밴드오브브라더스(Band of Brothers)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에피소드가생각이 났다.
그렇게 프랑스에 무사히 상륙을 하나 싶었는데,
영국에서 흐렸던 날씨가 도버해협을 건너 오니 결국 비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비가 내리는 프랑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프랑스의 첫인상이었다.
런던에서 터널까지는 금방이었는데,
터널을 빠져나온 뒤 파리까지는 한참을 기차로 달려갔다.
대부분이 산이 없는 넓은 평지를 달렸는데 비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기차를 타고 달리는 풍경이 나쁘지 않았다.
10시 21분
정확히 3시간 20분 걸렸다.
생각보다 너무 짧은 기차 여행이었다.
좀 더 오래 기차를 타고 싶었는데, 달리지 않는 기차를 재촉할 수 없었다.
서둘러 기차를 떠나가는 다른 손님과 달리 느릿느릿, 하는 수 없이 떠밀리듯 기차에서 내려야만 했다.
저기 2층,
오른쪽 내 은색 캐리어
어디 안 가고 잘 있었더라.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Bienvenue à Paris
기차로 국경을 넘는 경험,
비행기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보다 빠르고 쾌적했다.
파리 북역 (Paris Gare du Nord, 파리 가르 디 노르)
비행기를 타면 다시 시내로 이동하기 위해 노력을 했어야 했을 텐데
기차를 타니 바로 시내 중심가로 들어왔다.
도심 중앙으로 기차가 들어오기 때문에 기차를 내려서도 이동이 편하고 빨랐다.
종착역이다 보니 이곳에서 철로가 끊어지면서 바로 승강장과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입국장도 크게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정말 이렇게 파리 시내로 빠져 나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별거 없는 입국장이었는데,
유럽은 국경을 넘을 때 크게 입국심사나 여권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직접 체감해보니 너무나도 간소하고 간편했다.
파리 북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Bienvenue Paris Gare de Nord
그 문구를 사진으로 찍으려는데,
저기 사진에 보이는 직원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왜 본인을 사진으로 찍느냐는 것이었는데, 죄송하다고 얘기를 했지만 언짢아하는 모습으로 나를 계속 바라봤다.
런던에서는 풍경 사진을 찍으려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줬는데,
파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게 파리의 모습인가, 싶어서 조금은 서글퍼지고,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또 갑자기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온 파리, 국경을 뒤돌아 다시 런던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저기 역 밖으로 이동해서 숙소를 찾아 길을 떠나야만 했다.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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