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장소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런던의 지하철을 타는 것은 언제나 조금 설레는 일이다.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시설이 조금은 낡고 불편한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빠르고 쾌적했다.
지하철을 타고 노팅힐(Notting Hill)로 왔다.
너무 재밌게 봤던 영국 영화 노팅힐(1999년)의 배경이 되었던 동네다.
영화를 보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런던 방문 일정에 들러보기로 했다.
[노팅힐 메인 예고편]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산한 동네 같았다.
관광객보다는 실제 여기 사는 주민들이 더 많이 보였다.
노팅힐 Notting Hill
하이드파크의 북서외곽에 위치한, 웨스트 런던(West London) 지역이다.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와 휴 그랜드(Hugh Grant)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노팅힐의 배경으로 유명해졌다.
영화 이전에는 포토벨로로드(Portobello Road) 시장의 발생지로 알려진 지역이다.
실제로 노팅힐에 도착해 보니 침착한 동네 분위기에 사뭇 놀랬다.
엄청 북적대고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런던 시내 외곽의 주택가 같았다.
나는 이런 서민적인 모습이 참 좋다.
키가 똑같은 2층짜리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파스텔 톤으로 외벽을 꾸며놨는데
비슷하게 생긴 집을 자기네 집으로 구별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이렇게 이쁜 동네를 만드는데 한몫을 한 것 같았다.
노팅힐 게이트(Notting Hill Gate) 역에서 구글 맵을 이용 해
영화의 무대가 되었던 지역을 찾아 걸어가는 중이었다.
좁은 길이 길게 이어졌는데,
거리를 가늠해 보니 15분 정도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예쁜 동네와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30분 정도를 천천히 걸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긴장을 놓칠 수 없게 이런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계속 나타나서
그냥저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가게 밖 가판에 있는 기념품만을 구경하는 것도 너무 재밌었다.
계속 이런 여유를 누리고 행복해도 되나,
이런 호사가 내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너무 좋았다.
조용한 동네에 이런 카페가 숨어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 맘에 들었다.
사실 노팅힐 책방 보다 여기가 더 맘에 들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정도로
너무 맘에 드는 카페였다.
Farm Girl Cafe, Notting Hill
골목을 걷다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 소리의 출처를 찾다가,
쉽게 찾기도 어려운 작은 문과 골목을 지나 정원이 있는 작은 카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카페를 발견한 것이었다.
소심해서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는데
밖에서 얼핏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프레임 속 액자 같은 풍경을 만들어 주어 만족스러웠다.
혹시나 담에 내가 카페 사장이 된다면,
이런 카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풍경과 시간이었다.
혹시나 해서, 먼 미래 카페 사장이 된 나를 상상하며 가상으로 만들어 둔 카페가 딱 2곳이 있는데,
하나는 시드니의 워크숍 WorkShop,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기 Farm Girl Cafe다.
[시드니 WorkShop Cafe]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지금 내가 가진 카페의 기준은 이 2개의 카페가 다 만들어 준거다.
역에서 북쪽으로 북쪽으로 계속 조금씩 나아갔다.
역에서 멀어질수록 가게 수준이 아니라, 시장에 가까운 모습이 나타났다.
상점들은 더 대범해져서, 옆가게에 질세라, 더 이쁘고 재밌는 물건들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건들들이 이쁜 동네였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충분히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이렇게 산책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만끽하면서 길이 너무 짧지 않은 것에 고마워했다.
길은 곧게만 뻗은 것이 아니었다.
흥미를 잃을 겨를이 없었다.
방금 내려온 내리막 길에 이런 상가들이 쭉 줄지어 있었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은 아닌데, 그래도 하나씩 갖고 싶은 물건들이 간간이 보였다.
여행을 하면 아쉬움 중에 하나는
맘에 든다고 다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용적인 부분이나, 당장 손에 들고 가져갈 수 없다거나,
어떨 땐 캐리어에 빈자리가 없다는 핑계도 댄다.
포토벨로(Portobello)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 입구에는 시장 구역에 따라 어떤 종류의 상가가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앤틱 상점이 있는 구역이 가장 가까웠고
과일과 야채, 프리마켓, 골본(Golborne) 마켓 순서로 이어졌다.
[노팅힐 롱테이크 장면, 포토벨로 로드 시장]
영화 노팅힐에서 이 포토벨로 시장 풍경을 롱테이크(Long take)로 찍었는데
주인공이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계절의 변화와 카메라 무빙으로 표현했다.
아주 명장면이다.
한 여름이지만 낮에도 그렇게 덥지 않았다.
따스한 봄 날씨 같은 런던의 여름,
많은 사람들이 노티힐을 평화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내가 찾던 노팅힐 북숍(the Notting Hill Bookshop)은 포토벨로 마켓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중간중간 영화의 흔적을 찾다가 결국 영화 노팅힐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놓여 있어서 다른 가게에 한눈팔면 쉽게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간판도 외관도 영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 중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 준 것에 너무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곳에 오니 영화의 모습들이 장면 장면 떠오르는 듯했다.
저 문을 열고 서점 안으로 들어가면 휴 그랜트가 무심하게 나를 맞을 것 같았다.
노팅힐 거리를 걸을 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었는데,
서점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너도 나도 자기네들 사진을 좀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며 말을 걸었다.
그리고 꼭 내 사진도 찍어 주겠다고 사진 품앗씨를 자처하고 나섰는데
이제야 관광지에 온 것 같고 내가 다시 관광객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영화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계산대 위치도 그대로였는데, 조금 아쉽게도 벽지와 페인트 색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영화에서 이 장면과 대사를 가장 좋아했다.
갈등이 해소되기 바로 직전의 이 장면, 이 대사
There’s always a pause when the jury goes out
to consider their verdict.
최종 판결 전에는 항상 휴정을 하죠.
서로 오해가 쌓이고 마음은 자석의 서로 다른 극처럼 비켜가지만
누군가의 작은 용기와 배려로 오해가 풀리고 갈등이 해소된다.
반가운 책들이 몇 권 보였다.
영화 노팅힐의 오디오북, 그리고 한국과 서울 여행 가이드 북이었다.
한국에서 노팅힐을 찾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참 와보고 싶었던 가게, 서 보고 싶었던 장소였다.
안쪽 서고에 들어가 봤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벽을 둘러가며 책을 빼곡히 정리해 뒀다.
책을 사려는 목적이 아니다 보니 하나하나 책을 둘러보지 않았다.
여기 서서 그냥 여행자로서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We’re all mad here
서고에서 바라본 서점 입구의 모습이다.
성인 2명이 나란히 서기도 어려운 좁은 서고였다.
하지만 바닥까지 책을 펼쳐놓고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가 보여서 오래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나처럼 서점으로 들어와서 책은 안 보고 사진만 찍고 나가는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서점 주인으로 보이는 분도 딱히 제재하거나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도 꽤 오랜 시간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가게 앞에서 셀카를 여러 장 찍으며 노팅힐 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음 여행을 이어가기 위해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이동했다.
테스코 Tesco 매장도 만날 수 있었는데,
오래전 한국에도 들렸던 테스코가 생각이 났다.
해외 어느 나라를 가봐도, 한국처럼 빨리빨리 공사를 마무리하는 곳을 본 적이 없다.
공사뿐만 아니라 수리나 서비스센터에 가서 핸드폰을 고치고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추는 것도
한국이 가장 빠르다.
길가에 자전거 거치대를 공사로 치운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인도를 고치는 것 같은데 12주나 걸린다고 한다.
노팅힐 북쪽에 있는 래드브로크 그로브(LadBroke Grove) 역을 가서 지하철을 탔다.
다음 목적지는 다시 시내로 이동을 해서 런던의 저녁을 즐겨보기로 했다.
20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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